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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문을 여는 색,
마음의 문을 여는 기억
김소정 작가

편집실 · 사진 안호성

<이솝 우화>에서 해와 바람은 ‘누가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할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한다.
바람은 강한 힘으로 옷을 벗기려 했지만, 결국 따뜻하게 빛을 비춘 해에게 지고 만다. 김소정 작가의 작품은 해를 닮았다. 따스한 색감은 보는 이의 기억을 깨우고, 마음의 문마저 스스로 열게 한다. 그 기억의 틈으로 환경에 대한 고민도 들어온다.

김소정 작가의 작품 ‘그리다’

김소정 작가의 작품 ‘그리다’

기억 수집가의 기억에서 꺼낸 아름다운 조각들
기억은 사물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의 거리를 결정한다. 수십 개의 곰 인형이 있더라도 나와 어떤 기억을 공유하는지, 그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 에 따라 가깝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기억(의미)은 김소정 작가의 캔버스에 담긴다. 김소정 작가는 그림 작가이며 기억 수집가다. 그림일기를 쓰듯 기억 조각들을 수집한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손때 묻은 곰 인형, 몽당연필 등 작가는 살면서 얻은 작은 기억 조각들에서 의미를 찾고 감상과 온기를 화폭에 담는다.
기억은 대부분 아련하다. 그래서 김소정 작가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기억 조각들도 명확한 형체를 띠지 않는다.
“저는 기억 속에 숨은 감각·감정·온도·소리 등을 찾고, 이것을 대표하는 색채와 질감을 표현합니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기억과 표현의 반복을 통해 중첩되는 희미한 이미지와 색으로 그려나갑니다. 이러한 모호함이 있기에 관람객은 각자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꺼낼 수 있어요. 기억은 각자의 판단과 감정이 개입하면서 새롭게 각색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바다를 선명하게 그려내면, 관람객은 작가가 경험하고 생각한 바다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희미하게 그려낸 바다를 보면, 자기 나름대로 기억을 꺼내어 이미지에 투영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면 제 작품은 기억을 떠올릴 때의 감각을 시각화함으로써 보는 이가 각자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속에 자리한 기억과 맞닿기를 바라며 작업한 것입니다.”
김소정 작가의 작품은 작가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다. 보는 이의 기억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세계이며, 입체적 세계다. 그래서 작품은 사각 캔버스의 경계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관람객이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발견해내는 과정까지 이뤄져야 한 점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8월 21일까지 온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진행하는

8월 21일까지 온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진행하는 <낯, Reflection – 김소정展>

색의 중첩으로 만드는 입체 미술, 그리고 마술
입체적 세계는 색채를 통해서도 구현된다. 보통의 작품은 단면이다. 캔버스 뒷면에 작가의 낙서나 어떤 암호가 적혀 있다 해도 그것은 앞면의 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김소정 작가의 작품은 뒷면과 앞면의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는 김소정 작가가 사용하는 캔버스가 성긴 마(麻) 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김소정 작가는 캔버스의 앞면과 뒷면에 반복적으로 색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천의 작은 구멍들을 통해 캔버스 앞뒷면의 색은 서로 연결될 수 있다. 덕분에 독특한 색채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정지된 화면인데도 마치 입체 영상처럼 때로는 합쳐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준다. 선명하지 않되 따뜻한 우리의 기억과 같은 색이다.
대표작 ‘낯-Reflection’은 가까이에서 감상할 때는 색채와 질감이 먼저 눈에 띄지만, 실눈을 뜨거나 멀리서 보면 작품 속 이미지 형상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빛과 그림자의 표현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이 있는 연못(The Water-Lily Pond)’을 오마주해 구상했다. 인상주의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색 분할, 눈에서의 혼합, 사라진 형태성 등은 시대를 넘어 김소정 작가의 작품과 연결된다. 
이 외에도 김소정 작가는 단추, 자투리천, 고무줄, 플라스틱 조각, 파스타 면, 커피 원두, 돌 등 일상의 다양한 소재를 작품에 활용해 새로운 패턴과 독특한 질감 및 재미를 만든다. 화면의 두꺼운 질감은 팔레트나 화구에서 수집한 물감 조각을 사용해 만든다. 소재와 색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회화 방식은 입체적 효과와 재미를 줄 뿐만 아니라, 작품을 우리 눈으로 직접 봐야 하는 명분을 만들기도 한다. 

대표작에 대해 설명하는 김소정 작가

대표작에 대해 설명하는 김소정 작가

일상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작가만의 시각으로 표현한 ‘페일블루닷(PALE BLUE DOT)’

일상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작가만의 시각으로 표현한
‘페일블루닷(PALE BLUE DOT)’

기억의 틈으로 들어오는 ‘환경보호’의 의미
환경문제에 대한 고민도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전달된다. 작품 ‘기다림’은 무언가 놓인 바닷가 풍경에 대한 기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무언가는 자신을 두고 간 사람을 기다린다. 아마 오지 않는다면 그 무언가는 땅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의미를 잃어버린 물건은 쉽게 버려지고, 금방 썩지 않는 것일수록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버려진 의미의 운명이다. 작가는 현대사회의 환경문제가 “사람들이 쉽게 의미를 부여했다가 쉽게 거두는 생활과 소비를 하는 탓”임을 꼬집는다.
작품 ‘낯-Reflection’은 상호작용과 순환의 의미를 담는다. 캔버스 속 사람(面), 두 사람의 관계, 그 앞에 놓인 물은 서로가 서로를 비춰냄(reflection)으로써 연결된다. 겉으로 보기엔 일상의 풍경을 담아낸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자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이는 결코 단편적이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물을 바라보면,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내가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내가 한 행동이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내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죠. 환경문제를 대하면서도 우리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를 인식하고 각성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소정 작가는 “환경에 대한 생각과 메시지가 현대차 정몽구 재단의 그것과 맞닿았고, 덕분에 ‘ONSO ARTIST OPEN CALL 2023’의 참여 작가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작품 활동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재단의 지원으로 부담 없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전시, 홍보, 포트폴리오 아카이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를알릴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고요. 온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진행하는 여러 행사에 초대받을 때마다 온드림의 일원으로 대해주신다는 생각이 들어 소속감과 유대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억 수집가로서 제게 좋은 기억과 의미를 남겨주셔서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 같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발전하는 성장형 작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소정 작가의 작업 원동력은 기억과 의미에서 나온다. 이번 전시는 그의 기억 수집함에 기억 조각 여러 개가 새롭게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그 기억들이 김소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더욱 깊고 다채롭게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