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ck
menu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인재’다

고려대학교 전 총장 정진택 교수

편집실 · 사진 안호성

정진택

고려대학교 제20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라는 기치 아래 미래인재들과 함께 대학의 미래상을 구축하면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온 인물이다.

‘대학의 사회적 책무’, 2019년 3월부터 2023년 2월까지 정진택 교수가 늘 염두에 둔 말이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와 동시에 고려대학교 총장을 맡은 그는 4년간 미래사회를 위한 대학의 역할을 고민하며, 교육의 패러다임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하나씩 구축해나갔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길, 교수로 돌아온 지금도 그는 그 길을 따뜻이 걷고 있다.

혁신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용기
‘홀가분하다’라는 형용사가 있다. 거추장스러움 없이 가볍고 편안한 상태를 뜻하는 단어다. 이 산뜻한 낱말의 의미를 그는 요즘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책임감과 긴장감에 짓눌렸던 대학 총장으로서 4년을 보내고, 평범해서 더 귀한 시간을 모처럼 한가롭게 보내고 있다. 관용차를 쓰지 않게 된 뒤부터 줄곧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하루 평균 1만3,000보를 걷기 때문에 따로 건강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들 표정을 읽을 수 있어 여간 재미난 게 아니다.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는 즐거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여유로움과 자유로움을 그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만끽하고 있다.
“그야말로 쉼표 같은 시간이에요. 마음이 가벼우니 앞으로 진행하는 일을 구상하는 데도 아주 도움이 돼요. 그중 하나가 ‘그린 소사이어티’예요. 그린 소사이어티는 현대차 정몽구 재단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업무 협약을 맺고, 기후 난제를 해결할 기업가형 연구자를 육성해나가는 프로젝트예요. 영광스럽게도 제가 총괄위원장을 맡았어요. 연구부터 사업화까지 각 분야의 좋은 팀들과 머리를 맞대며 진행해나갈 겁니다. 인류의 당면 과제 중 가장 시급한 문제인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데 저의 경험과 구상이 작은 보탬이 되길 바라요.”
사실 인류의 당면 과제를 ‘풀어가는’ 데 그만한 적임자가 또 있을까 싶다. 그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2019년 3월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불확실성의 시대가 막 도래한 시점이었다. 전대미문의 그 시기에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미래사회를 선도할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해 교육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개편한 것이다. 공학박사인 그에게 미래는 ‘기술’로 열어가는 하나의 문이다. 공학이라는 이름의 혁신이 사회 변화를 이끈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서,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맞는 ‘참여형 스마트 캠퍼스’를 차례차례 구축했다.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신분증을 발급하고 모바일 통합 앱을 신설하는 한편, AI 기반 맞춤형 학업 지원 서비스와 ICT·IoT 기술 기반의 안전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마트 시스템으로 데이터를 쌓고, 차곡차곡 쌓인 빅데이터를 학교 발전에 이용하도록 했다.

인본주의, 그 오래된 미래 유산
“시대에 맞는 창의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인공지능대학원, 데이터과학과, 스마트보안학부, 융합에너지공학과, 스마트도시학부, 미래모빌리티학부, 지능형반도체공학과 등 첨단 학과를 대거 신설했어요. 여러 기업체와 협력해 스마트모빌리티학부(현대자동차), 반도체공학과(SK하이닉스), 6G차세대통신학과(삼성전자), 배터리-스마트팩토리학과(LG에너지솔루션) 등 채용 연계형 계약학과도 새로 만들었고요. 메디 사이언스 파크와 정운오 IT 교양관 및 청담 고영캠퍼스 같은 창의적 공간을 조성하고, 과학도서관과 대학원도서관도 전격 레노베이션했지요. 구성원의 협조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이 모든 혁신의 중심에 ‘사람’을 두었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라는 기치 아래, 대학의 모든 구성원을 중심에 두는 대학 만들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인본주의와 상호 존중이야말로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이라 생각한다. 그 한 단면이 고려대학교의 ‘교우’ 문화 안에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려대학교는 동문 대신 교우라는 말을 쓴다. 서로를 벗으로 여기며 함께 나아가는 문화. 학교 발전의 원동력이 된 그 문화를 그는 자신이 해나가려는 일련의 과제들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슬로건부터 ‘휴먼 KU’다.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라는 기치는 거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4년간 ‘창의와 혁신, 다양성과 포용력, 시대적 소명’을 과제로 삼았어요. 창의와 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다양성이라고 생각해요. 각자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 믿거든요. 다양성을 존중하면 포용력이 생기고, 포용력이 생기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봅니다. 제가 지도한 대학원생 연구실에 ‘실훈’이 3개 있어요. 노력, 실력, 포용력.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실력’을 쌓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성공을 넘어 인류와 사회에 기여하는 넓고 자신만만한 마음, 즉 ‘포용력’을 갖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창의와 혁신으로 무장한 융합형 인재. 그가 생각하는 미래인재는 비단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다름’을 수용할 줄 알고, ‘그늘’을 포용할 줄 알며,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진짜 인재라고 믿는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유산은 ‘사랑’이다. 40년 넘게 공학의 숲을 누벼온 그가 변함없이 믿고 있는 가설이자 명제가 바로 이것이다.

1993년부터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해온 정진택 교수

1993년부터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해온 정진택 교수

대학, 사회적 책무를 생각하다
‘시대적 소명’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9년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1993년부터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생애의 3분의 2 이상을 몸담아온 이 학교에서 그가 배운 건 ‘시대의 변곡점마다 대학이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 일제강점기부터 그 시대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지혜와 용기와 힘을 모아온 선배들을 보면서, 머리보다 가슴으로 새겨온 신념이다.
“갑자기 맞게 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또 하나의 변곡점으로 받아들였어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목표에 대학이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SDGs(유엔이 발표한 지속가능개발목표)를 교육· 연구·행정에 접목했어요. ESG(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 구조Governance의 약자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개념)도 도입했고요. 국내 대학 최초로 ESG위원회를 만들고, 2045년까지 탄소중립을 선언했어요. 고령사회연구원·통일융합연구원을 신설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사회의 당면과제를 잊지 않는 것, 이게 대학의 역할이라 믿어요.”
그는 평교수 시절 75분간의 강의 중 중간의 5분 정도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접한 ‘좋은 이야기’를 학생들과 공유했다.이른바 ‘사회인 시리즈’다.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을 학생들이 갖추기를, 그리하여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학생들은 그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졸업한 제자들이 찾아와 “그때 들려준 말씀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해줄 때 가장 행복하다.
“미래인재가 될 학생들에게 경험을 많이 해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나쁜 경험이란 세상에 없으니까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친구가 빈곤국으로 여행을 가면, 몇 킬로미터를 걸어 물을 길어오는 그곳 아이들의 수고로움과 여러 어려움을 접하게 될 거예요. 그 모습을 보면 인생관이 달라질 겁니다. 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할 거라 믿어요. 경험은 공감으로 이어지고, 공감은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여기에 있어요.”
그는 자신을 촬영하러 온 사진작가의 짐을 기꺼이 들어줄 줄 알고, 자신을 만난 적이 있는 기자와의 과거를 따뜻이 소환할 줄 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낮춤’ 의 가치를 잊지 않는 사람, 그런 그가 ‘포용’과 ‘경험’의 힘에 대해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어른다움이 낳은 자애로움이 하도 그윽해서, 돌아갈 시간인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래인재가 될 학생들에게 경험을 많이 해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나쁜 경험이란 세상에 없으니까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래인재가 될 학생들에게 경험을 많이 해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나쁜 경험이란 세상에 없으니까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진택 교수는 모든 혁신의 중심에 ‘사람’을 두었다.

정진택 교수는 모든 혁신의 중심에 ‘사람’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