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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의 예술
르브낭(revenant), 다시 돌아온 자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
르브낭(revenant),
다시 돌아온 자

심상용(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환경은 크게 변화했으며 인공지능(AI)의 발전을 이끌었고, 이러한 변화는 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예술은 늘 변해왔지만 고도의 판단과 예지력을 요하는 사안조차 AI의 몫이 된다면 과연 어떨까? 인공지능 시대, 예술의 새 패러다임을 논해야 하는 시점이다.

마크 퀸이 런던 시내에 설치한 앨리슨 래퍼의 대리석상

마크 퀸이 런던 시내에 설치한 앨리슨 래퍼의 대리석상

정신과 감각의 서식지
영국 작가 마크 퀸(Marc Quinn)은 런던 시내의 높은 조각대 위에 양팔 또는 다리가 불완전한 형태를 띠는 선천적 기형의 일환인 해표지증(海豹肢症, phocomelia)을 가지고 태어난 화가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 1965~ )의 대리석상을 세웠다. 미래의 영웅은 정치적 지도자나 전쟁 영웅, 발명가나 순교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에서다. 한국의 젊은 작가 손석기는 살아 있는 닭을 투명한 케이지에 담아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공장식 양계장에서 짧은 시간을 살다 도축으로 생을 마감하는 ‘약한 존재’에게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특권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다. 단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사죄와 연민이 전부는 아니다. 욕망의 공간인 현대미술관에서 피곤함만 느낄 뿐인 이 짓밟히고 모독당하는 미약한 존재를 통해 작가는 예술적 성공과 스타 작가를 꿈꾸는 자신, 더 나아가 인간의 덧없는 욕망과 마주한다.
인류가 지구 생태계에 미친 절망적 영향에 주목하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 담론이 전에 없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람들은 높은 진화를 자처하던 정신이 한 세기를 피로 물들이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인간 중심 문명의 전성기가 막을 내렸음을 직감해야 했다. 근대의 계몽된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넘칠 만큼 보여주었다. 지구온난화 같은 기후변화, 생물종 소멸과 생태계 다양성의 소실, 여섯 번째 대량 절멸의 전조일 수 있다. 인공 물질의 확대, 예컨대 핵실험에 의한 퇴적물로 인해 북반구에 거주하는 남성들의 고환에는 상당량의 방사성물질이 축적되어 있다. 수심 1만540m의 심해에서도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된다. 동식물은 자신들의 서식지를 잃어버렸다. 서식지 파괴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달동네와 판자촌을 갈아엎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를 세우는 한국 사회의 물화(物化) 과정, 물질적 가난을 극복하는 고도의 자본화 과정이 그렇다. 물질적 부(富)를 향한 거주지의 대대적인 이동이 사회적 과정을 통제했다. 정든 장소를 등지고 깊은 유대 관계를 파탄 내는 이주들로 도시는 장소성을 잃었다. 삶은 새것과 새 기술과 새 삶을 탐닉하는 것으로 욕망화된 공간이 된다. 연대의 파탄은 동력을 잃은 비행기의 추락처럼 삶의 질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일상은 견디기 어렵고 무의미한 것의 이름이 되었다. 새것을 추구할수록 권태로운 것으로 돌아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이런 말을 했다. “옛것은 행복으로 배부르게 해주는 일용할 양식이다. 옛것은 행복을 준다.” 일용할 양식은 순식간에 빛이 발하는 매력은 없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마치 ‘길’과도 같다. 길은 싫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걸을수록 오히려 정겨워진다. 같은 길이 지겹지가 않다. 매번 모르는 길을 가는 걸 상상해보라.
우리의 예술적 취향이 고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동안 접해온 작품들 덕이다. 과거는 새로운 예술이 주는 참신함을 더 많이 느끼도록 하는 중후한 배경음이 된다. 과거는 정신과 감각의 서식지다. 과거를 잃은 정신과 감각에선 서식지를 잃은 동식물의 위태로운 생명력이 감지된다. 뿌리의 부재! “과거의 전율은 결코 현재의 감각에 기생하지 않는다.”(파스칼 브뤼크네르) 우리의 감각이 새로움, 매력, 흥분, 오락에 취해 있을 뿐이다.

“내가 진실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진실되지 못하다”라고 말한 시몬 베유

“내가 진실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진실되지 못하다”라고 말한 시몬 베유

“진실 추구의 본성과 깨어 있는 현실 인식을 위해 인간이 죽음을 뚫고 돌아와야만 한다. AI 시대는 통제하기 어려운 왜곡과 거짓의 시대가 될 개연성이 크다. 진실과 마주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지능(知能)이 아니라 지성(知性)을, 지성이 아니라 지성을 넘어서는 지성의 ‘어두운 밤’ 인식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르브낭(revenant), 다시 돌아온 자(者)
기술 혁명이 사이보그 같은 새로운 인간형, 즉 포스트휴먼의 출현을 허락할 것이고, 그 종은 여러 층위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한 종일 것이다. AI 시대가 이 가설에 엔진을 달아주었다. 인공 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과 딥러닝(deep learning)이 인간의 고유한 창의성마저 위협한다. 생성형 AI가 창작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경계를 무효화하면서 예술의 경지를 넘본다. 공식적으로 ‘AI 미술 시대’가 선포된다. 예술은 늘 변해왔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고도의 판단과 예지력을 요하는 사안조차 AI의 몫으로 넘어가는 건 어떤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 사회의 기반이 위축되고, 큰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인간의 시대를 끝내야 할 거라는 담론들이 이러한 우려에 힘을 싣고 있다.
지켜질지는 의문이지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되는 전제가 중요하다. 첫째, AI 시대에도 중차대한 판단의 주체는 인간이어야 한다. 둘째, 사회적·윤리적으로 올바른 자격을 갖춘 인간이어야 한다. 셋째, 판단 주체는 익명이 아닌 실명으로 판단에 관여해야 한다. 올바른 윤리적 자격에 책임을 전제로 하는 실명이라니, 흥미롭게도 모두 고전적 요인이다. AI 시대에 오히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윤리적 인식과 감수성, 타인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므로 이의 이해와 고양을 위한 보다 전방위적 노력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진실 추구의 본성과 깨어 있는 현실 인식을 위해 인간이 죽음을 뚫고 돌아와야만 한다. AI 시대는 통제하기 어려운 왜곡과 거짓의 시대가 될 개연성이 크다. 진실과 마주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지능(知能)이 아니라 지성(知性)을, 지성이 아니라 지성을 넘어서는 지성의 ‘어두운 밤’ 인식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작금의 인류세 담론이 여하히 보고하듯 지성은 한계를 여하히 드러냈다. 지성은 대상을 분별하는 데 있어 거듭 과오를 범했다. 프랑스의 시몬 베유(Simone Weil)에 의하면 지성은 정직하지도 창의적이지도 않다. 긍정하거나, 부정해 여러 의견을 제시하는 우리 속의 한 부분인 지성이 행하는 일은 오로지 눈먼 복종이다. 또 ‘이해’는 얼마나 자주 위선을 동반하는가. 베유는 말한다. “내가 진실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내가 진실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랑하는 것들만큼이나) 진실되지 못하다.” 그렇기에 지성의 ‘어두운 밤’이 요구되는 것이다. 눈먼 지성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는 것, 진정한 지성은 지성의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 지적 깨달음은 전혀 충분하지 않다. “현실을 접촉하려는 갈망이 없는 영혼 안에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시몬 베유) 이 지성은 “약자의 고통에 눈뜨는 사유”(장 폴 샤르트르)와 “이웃을 재발견하는 간절함”(자크 엘륄)으로 세워진다.
지성의 어두운 밤이 그러하듯, 예술의 어두운 밤이 인공지능 시대 예술의 새 패러다임을 논하는 지점이어야 한다. 인간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다른 열림, 다른 시작일 뿐이다. 새것에 집착하는 기술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예술, 이를 위해 “계시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파스칼 브뤼크네르) “우리는 언제나 다시 돌아간다.”(가스통 바슐라르)

<참고 도서>

  1. 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이세진 옮김(서울: 인풀르엔셜, 2023) p.114~116
  2.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서울: 문학과지성사, 2021) p.174
  3. 리 A. 키신저, 에릭 슈밋, 대니얼 허튼 로커, <AI 이후의 세계>, 김고명 옮김(파주: 김고명, 2023), p.239

심상용 
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이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다. 유럽문화예술학회 부회장, 광주비엔날레 운영위원회 자문위원,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회 학술위원 등 미술사학 및 미술비평 분야에서 활동히 활동하고 있다. <명화로 보는 인류의 역사>, <예술, 상처를 말하다>, <인생에 예술이 필요할 때>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