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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하는 시간 속
익명의 풍경

김연홍 작가

편집실・사진 안호성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흐릿하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향하는 시간에는 정지선이 없고,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이 뚜렷하게 보일 리 없다.

김연홍 작가는 그 흐릿한 경계에서 느껴지는 미묘함과 생동감을 작품에 담는다.
전시 <시원하고 따뜻하게>에도 지금 이 계절과 풍경의 경계가 스며 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흐릿하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향하는
시간에는 정지선이 없고,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이
뚜렷하게 보일 리 없다.

김연홍 작가는 그 흐릿한
경계에서 느껴지는 미묘함과
생동감을 작품에 담는다.

전시 <시원하고 따뜻하게>에도
지금 이 계절과 풍경의
경계가 스며 있다.


익명의 공간에서 찾은 익숙한
풍경과 감각

어디에도 가만히 있는 것은 없다. 나뭇잎은 쉼 없이 흔들리고, 이 순간에도 차근히 꼬박꼬박 제 잎을 물들인다. 나조차 잠시도 멈춰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마치 정지 화면처럼 풍경을 그리지만, 멈춘다는 것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 김연홍 작가의 작품처럼 말이다.

김연홍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감각을 자신만의 필터로 정제해 내보이는 사람’을 작가라고 정의한다. 그의 필터를 거치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찾은 감각이다. 그는 감각을 발견하기에 앞서 웹에서 자연 풍경 이미지를 수집하고, 그 안에 자신을 투영해 마치 직접 바라 보고 경험한 듯 상상한다. 모든 경험과 단절된 팬데믹 시기에 작가가 찾은 자신만의 감각 수집 방법이다.

작가는 익명의 풍경 이미지와 현실에서 경험한 계절적 감각을 중첩해, 현실과 상상이 얇게 포개진 독특한 시공간을 창조해낸다. 따라서 김연홍 작가의 캔버스에 담기는 공간은 현실이자 가상의 공간이며, 이름 붙일 수 있지만 익명의 공간이다.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과 온도, 절로 눈을 찡그리게 하는 강한 햇빛, 폐부에 닿는 새벽의 풀잎 향 등 공간 안에서 마주한 운동성과 시간성을 다양한 색채로 스미듯 그린다. 자연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에서 얻은 감각은 작품 안에 우연하고도 즉흥적으로 담긴다.

온드림 소사이어티에서 개최하고 있는 전시 <시원하고 따뜻하게>는 우리의 보편적 경험 중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 가는 계절의 전환과 감각을 담았다. 늦여름과 초가을은 따뜻한 햇볕이 남아 있지만, 그 위로 상쾌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복합적 계절이다. 김연홍 작가는 두 계절이 교차하는 순간의 온기와 색·바람 등의 감각을 포착해 캔버스에 담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담아냈다.

계절은 시원하고 따뜻하게
흐른다

익명의 공간에서 찾은 보편적 감정과 인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경험해본 듯한 친밀감과 아늑함을 준다. 김연홍 작가의 작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모두의 경험 속에 자리 하는 색으로 그려졌기 때문일 터.

“제가 쓰는 색은 모두 우리 일상에서 찾아 뽑아온 것들입니다. 요구르트 뚜껑의 색, 작업실 책상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오래된 건물의 빛바랜 벽처럼 실생활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색들이죠.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노을·여름·바다 등 시간과 계절,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색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작품 안에서 관객과 시각적 감각 및 정서를 공유함으로써 편안함과 안락함을 선사하고자 했습니다.”

대표 작품 ‘From Green to Yellow’의 상부는 싱그러운 레몬과 연초록 계열의 색을, 아래로 내려갈수록 올리브 그린과 황금빛을 닮은 주황 계열의 색을 혼합해 썼다. 여름과 가을을 닮은 색들이며, 운명처럼 김연홍 작가의 이름 ‘연홍’에 담긴 색이기도 하다. 작품의 위에서 아래로 흐름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여름과 작별하고, 서서히 가을을 마중한다. 더불어 각 계절이 갖는 고유의 아름다운 색을 함께 지키자는 작가의 메시지를 만난다.

“‘From Green to Yellow’는 계절의 흐름과 감각을 면밀하게 관찰해 그 순간을 매우 크게 확대·표현한 작품입니다. 바람 한 줄기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계절감을 대형 캔버스에 확장해 그려냈죠. 이처럼 감각을 증폭해 표현한 이유는 관객에게 자연과 색채의 흐름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소중함을 느끼며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시간을 선 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온드림 소사이어티 공간을 영리하게 활용한 것도 특징이다. ‘Our Days’는 40.9 ×53cm 크기의 작품 여섯 점을 전시 공간 내 기둥에 일렬로 배치함으로써 시선이 이동하면서 만나는 색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느끼도록 한다. ‘From Green to Yellow’는 작품이 걸린 벽 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어우러지며 현실과의 경계를 다시 지운다. 계절의 색과 빛은 캔버스를 통과해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모이며, 작품을 끝없이 연장한다. 달리 말하면, 전시 공간인 온드림 소사이어티 안과 밖이 모두 ‘시원하고 따뜻한’ 공간이다.

변하고 싶은 것과
변하고 싶지 않은 것

되돌아보면 김연홍 작가는 마치 계절이 그러하듯 매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작품 활동 초기, 그는 인물의 익명성이나 모호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인물과 공간 사이 오라를 펜 붓을 사용해 흐릿하게 표현하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천 위에 물감이 스며들며 자연스럽게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발견한 후로 현재의 기법을 완성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흐릿한 경계조차 철저히 계산해 표현했으나, 점점 우연성과 즉흥성을 받아 들이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김연홍 작가는 또한 발짝 나아갔다. 처음으로 296×184cm 크기의 대형 작품을 선보인 것이 첫 번째 도전이다. 2024 온드림 소사이어티 청년작가 공모에 선정된 후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봐라. 그리고 대표작이 될 수 있을 만큼 해라”라는 조언을 들은 김연홍 작가는 커다란 캔버스에 계절을 담아보기로 했다.

“‘From Green to Yellow’는 제가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 중 가장 큰 사이즈예요. 스미는 기법으로 흐린 경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하루 만에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대형 작품을 도전하기가 망설여졌죠. 하지만 용기를 내어 도전했고, 천천히 긴 강물 위를 유영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변하지 않길 바랐지만, 변한 것도 있다.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여름의 날씨, 책장을 찢듯 날카롭게 바뀌어버린 계절이 그것이다. 나날이 뚜렷해지는 기후변화를 목격하며, 김연홍 작가는 누구보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시가 시작되고 3주가 넘었는데도 한여름 같은 더위가 이어져 처음에는 머쓱했어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갑자기 계절이 바뀌더군요. 늦여름과 초가을을 건너뛰고 금방 가을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에요.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면서 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 해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변할 것은 변한다. 흐르는 시간도, 이별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소중한 일상이 너무 급격하게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속도를 늦추고자 노력할 수는 있다. 이처럼 김연홍 작가의 작품은 계절의 변화를 담았지만, 결국 우리의 변화를 이끈다. ‘시원하고 따뜻한’ 지구의 색을 지켜내려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