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끊겼다.
영재교육원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며칠 뒤 응급실 문을 두드린 김지율 어린이는
그 자리에서 급성림프모구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이어진 1년 7개월의 항암 치료,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한 라파엘 어린이학교의 수업 속 활동들.
집중 치료를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 김지율 어린이가 자신의 가장 무거웠던 시간을 직접 적어 보내왔다.
2024년 가을,
평범한 일상이 갑자기 끊겼다.
영재교육원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며칠 뒤 응급실 문을 두드린
김지율 어린이는 그 자리에서
급성림프모구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이어진 1년 7개월의 항암 치료,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한
라파엘 어린이학교의 수업 속 활동들.
집중 치료를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 김지율 어린이가
자신의 가장 무거웠던 시간을
직접 적어 보내왔다.
김지율
급성림프모구백혈병 진단 후 1년 7개월째 치료 중인 초등 6학년 어린이. 디지털 드로잉·만들기·체육 수업을 통해 다시 일상을 그리는 중. 아픔을 치료해주는 교수님 같은 의사가 되는 게 새로운 꿈이다.
마음을 보듬고
일상 복귀를 응원하는 동행
현대차 정몽구 재단은 ‘CMK 메디컬’ 의료 사회공헌사업을 통해 중증·희귀 질환 환아 및 의료 취약계층의 치료 과정을 지원하고, 심리·정서적 회복과 일상 복귀를 돕는 프로그램을 함께 꾸려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과 함께 운영 중인 ‘라파엘 어린이학교’다. 병원 안에서 접하는 미술·무용·코딩 수업과 놀이·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길고 힘든 치료의 시간 속에서도 추억을 쌓고, 마음의 긴장을 풀 수 있도록 곁을 지킨다.
그날, 롯데월드에서 만난 백혈병
저는 2024년 10월부터 치료를 시작한 초등학교 6학년 김지율입니다. 2년 전 저는 급성림프모구백혈병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열심히 다녔던 영재교육원 마지막 수업이 롯데월드에서 현장 체험을 하는 것이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몸에 기운이 없고 어지럽고 속도 울렁거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열이 내리지 않고 체력이 점점 떨어지는 게 느껴져 응급실을 방문했다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액만 맞고 오려고 간 병원에서 골수 검사, *히크만 카테터 시술 같은 너무 많은 일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무서웠고, 엄마 눈은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엄마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지만, 자꾸 무언가를 찾아보고 통화하고…. 엄마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관해 유도를 시작하면서 한 달만 버티면 완치되는 줄 알고 한 달 동안 열심히 항암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퇴원할 즈음 의사 선생님께서 “3년 동안 계속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는데 3년이라니…. 정말 크게 상심했습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머리카락은 다 빠져 민머리가 되었고,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얼굴은 달덩이처럼 부어 거울을 보고 있으면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고, 그 불안감은 엄마에 대한 짜증으로 자꾸 새어나왔습니다. 매일같이 엄마한테 화내고 짜증 낸 것 같습니다.
*히크만 카테터 (Hickman Catheter)
환자에게 지속적인 주사, 수혈, 혈액검사, 항생제 투여 등이 필요할 때 매번 바늘로 찌르는 일을 줄이기 위해 가슴 부위에 길게 삽입해두는 굵은 정맥관
*관해 유도
백혈병 세포 99% 감소를 목표로 한 첫 단계 항암 치료. 피와 골수에서 백혈병 세포가 검출되지 않는 관해 상태를 유도
라파엘 어린이학교,
처음 내 이름을 적은 날
병원에 너무 가기 싫었지만 *공고 항암을 하기 위해 지친 몸을 끌고 투덜거리며 다시 입원했습니다. 그때 병원 복도에서 마주한 곳이 라파엘 어린이학교였습니다. 엄마는 본격적으로 온라인 수업을 할 수 있는지, 출석은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알아봐주셨습니다.
라파엘 어린이학교에서는 많은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워서 수업 참여표에 이름을 적는 것조차 못 했습니다. 어린이학교에는 많은 친구가 항암 링거를 달고도 씩씩하게 치료를 받으면서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용기를 내어 수업 참여표에 이름을 적었고, 또 한 번 용기를 내서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많은 수업 중에서도 저는 디지털 드로잉과 만들기 수업, 닌텐도 체육 수업이 너무 즐겁고 신났습니다. 학교에서 못 했던 과목들을 라파엘 어린이학교에서 선생님과, 또 같이 치료받는 친구·동생들과 함께 배우는 동안에는 아픈 것도 잊을 만큼 재미있었습니다.
가장 좋아한 수업은 디지털 드로잉이었습니다. 아이패드로 하나씩 선을 긋고 색깔을 입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림에만 집중해서 아픈 것도, 속상한 것도, 민머리인 내 얼굴도, 퉁퉁 부어버린 내 다리도 다 잊고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간호 선생님도, 의사 선생님도, 엄마도 저를 찾으러 학교로 오실 만큼 3~4시간씩 집중할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을 일주일 넘게 걸려 엽서로 만들어, 제 마음속 롤 모델인 조수정 교수님께 선물로 드리고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학교 모임인 ‘야구즈’ 친구들에게 줄 행운의 네잎 클로버 엽서도 만들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디지털 드로잉은 정말 좋은 수업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났고,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그 시간만큼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공고 항암(공고 요법)
1차 치료 후 미세한 잔존 세포를 박멸하기 위한 강화 요법. 백혈병 치료의 두 번째 단계
병원 밖에 나갔을 때의 두근거림
그렇게 병원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정말 병원을 나가고 싶었습니다. 병원 벽에 붙은 뮤지컬 〈알라딘〉 포스터를 보고 바로 신청했고, 꼭 가겠다고 의사 선생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먹기 싫은 밥도 잘 먹고, 약도 시간 맞춰 잘 챙겨 먹으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함께 샤롯데씨어터에 들어섰을 때는 마음이 정말 두근거렸습니다. 이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저에게 너무 고마운 선물이었습니다. ‘나만 대머리인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순간, 병원에서 친하게 지낸 동생이 보였고 라파엘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도 함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공연장에 들어갈 때부터 끝날 때까지 정말 웅장하고 재미있고 신났습니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몰입했습니다. 〈알라딘〉을 보고 잠시 뮤지컬 배우라는 꿈도 꿨습니다. 다만 제 연기와 노래 실력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앞으로 좋은 공연과 노래·춤으로 제 인생을 활력 있게 채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뮤지컬을 보면서, 한때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아져 있던 희망이라는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학교로,
그리고 성장한 나의 모습
집중 치료 기간이 끝난 2026년 3월부터는 학교도, 학원도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소심하고 망설이는 성격이었는데, 라파엘 어린이학교에서 다양한 수업을 듣고 친구들·선생님과 어울리면서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바뀌어 학교에서도 적응을 잘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백혈병이 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는데도 수학 경시 대회, 한자 급수 시험, 영어 경시 대회, 한국어 능력 시험 등에서 상도 많이 받아 자신감도 향상되었니다. 라파엘 어린이학교는 규모는 작지만, 학업을 놓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 많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인해 마음가짐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일이 조금이라도 안 풀리면 금방 포기했고, 위험하고 힘들 것 같으면 피하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은 일이 잘 안 풀려도 꾸준히 나아가고, 위험해 보여도 ‘일단 한번 시도해보자’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지금 백혈병 진단을 받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환아·가족이 있다면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굉장히 힘든 과정이고, 환아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저도 혼자서 버티라고 했다면 못 견뎠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응원해주는 가족, 저를 치료해주기 위해 바쁘게 일하시는 의료진, 어린이학교가 있었기에 이 시기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치료 도중 모두가 지칠 때 저를 보시면서 한 번 더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막 시작한 친구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고 열심히 치료받고 즐겁게 생활하려고 노력하면 분명히 완치할 수 있습니다. 함께 노력해요. 그 누구보다 자신이 훌륭하고 멋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지율이에게 묻다
-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리고 극복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엄마는 빈혈이라 치료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의료진이 하시는 말씀은 전혀 달랐습니다. 내가 죽을까 봐 너무 무서웠고, 머리가 빠지는 순간에는 정말 너무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제 병에 대해 공부했고, 엄마가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셔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 치료를 마무리하면 가족과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집중 치료는 끝났지만, *유지 항암을 2년 정도 더 받아야 합니다. 항암이 끝나는 날에는 가족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제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은 가족사진이 없습니다. 민머리인 저 때문인지, 함께 머리를 밀어준 아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날에는 정말 예쁘게 하고 가족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유지 항암
백혈병 치료의 마지막 단계. 1·2단계에서 백혈병 세포를 거의 박멸한 뒤 재발을 막기 위해 약하게, 1~2년의 기간을 유지하는 치료 요법